작은배

[논문 발표]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 요한의 영적 과정에 대한 가르침에 나타난 "영혼의 정화"에 대한 관점 비교

고수 2007. 10. 6. 20:54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 요한의 영적 과정에 대한 가르침에 나타난 "영혼의 정화"에 대한 관점 비교
(김평만 신부의 박사 학위 논문)

9월 사목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정기 세미나는 김평만 신부님의 학위 논문 요약 발표였다.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요약한 글 중에 핵심 부분을 간추려 옮겨 본다.

1.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의 특징

1.1. 그리스도 중심적인 가르침
영적 생활의 여정은 聖性에로의 하느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이냐시오에게 영혼의 정화는 그의 영성수련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심화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정화가 완성된다. 또한 십자가 성 요한도 영혼의 정화의 모델이요 핵심은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다름아닌 정화의 길로 강조된다.

1.2. "세 가지 길"에 기초한 영적 여정
여러 영성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영성 생활의 여정과 그것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길"(Tre vie)를 통해 영성 생활의 발전을 구분 지었다. 이것은 영적 체험의 3가지 특징적인 단계로서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혹은 "초보의 단계", "진보의 단계", "완덕의 단계"로 구분된다.
성 이냐시오의 경우 영성생활의 발전과정의 틀로서 "세 가지 길"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기 위해 영혼의 정화를 기술하고 있으며, 십자가 성 요한에서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예컨대 두 성인에게서 모두 영적 여정에서 정화의 길이 강조되지만 정화가 강조되는 이유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성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토대로서 정화의 단계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과의 온전한 합일을 위한 토대로서 정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1.3. 모든 영적 여정 안에서 지속되는 정화
초보자 단계에서 영혼은 주로 은총의 도움으로 죄와 죄와 죄의 긴밀히 결탁된 세력으로부터 정화된다. 이로써 영혼은 죄로부터의 회심을 통해 영성 생활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진보자가 주로 걷게 되는 조명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닮고 따르는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 영혼이 그 자체로 죄는 아니지만 순수 자연적으로만 작용하려는 영혼의 이기적인 경향성으로부터 정화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빛이 보다 깊숙이 조명됨에 따라 보다 내밀한 순수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경향성들로부터 영혼이 정화됨을 의미한다. 일치 단계에서 영혼의 수동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영혼은 온전하고 완전하게 정화된다. 이러한 완전한 정화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고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두 성인에게 있어서 영혼의 정화는 단순히 정화 단계에서만 한정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명, 일치 단계에서도 계속되는 영적 여정의 전 과정에 걸쳐 계속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1.4. 두 성인의 영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차이점
영혼의 정화는 선사 받은 은총에 협력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성인의 주장은 일치하고 있다. 영혼의 장애물에 대항하는 "능동적인 영적 투쟁", 그리고 "향주삼덕의 실천", 영혼이 점점 수동적으로 되어갈 때 "하느님의 개입"에 대하여 두 성인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두 성인에 있어서 향주삼덕의 실천은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향주삼덕의 실천이 영혼을 정화시키는 보다 중심적인 방법이요, 영성 생활의 핵심이라는 사실에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두 성인은 자신들의 고유한 관점에서 기인되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성 이냐시오의 경우 "정화의 생활" 예컨대 영성생활의 실천적인 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정화가 지속되어 나감에 따라 영혼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이론적인 설명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따라서 향주삼덕의 실천을 다룸에 있어서도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묵상과 관상, 수덕과 보속을 통해 향주삼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는지 그 과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의 성 요한은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신학적인 결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성인의 영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이냐시오는 구체적인 삶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여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 성 요한은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완전한 일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때문에 두 성인 모두 인간의 의지에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지만, 십자가 성 요한이 의지의 정감적인 부분에서의 완전한 합일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성 이냐시오는 의지의 실천적인 부분에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다.

2. 영성 생활 안에서 "정화의 길"의 적용
두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영성 생활의 올바른 방향을 깨닫고 잘못된 영성 생활을 식별할 수 있는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1. 정화는 영성 생활의 기초이다.
영혼의 정화가 없게 되면, 영혼은 여러 가지 유혹과 나쁜 경향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어둠에 종속되고 만다. 정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전달된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정화는 파스카의 신비를 우리 삶 안에 적용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기쁨만을 강조하는 영성은 크리스챤 영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2. 정화의 대상: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에서의 무질서한 애착의 초탈이다.
때때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과 근원적인 정화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한 감각적인 차원, 개념적인 차원을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많다. 왜냐하면 신적인 차원은 무제한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제한적인 차원을 통해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 성취한 구원업적에 대한 묵상뿐 아니라 신성의 무한한 심연 안에 잠겨드는 데에 필수적인 상념 곧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상념까지 포기할 것을 제안하곤 한다.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위하여 근원적인 "부정"이나 "초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영성 작가들이 영혼의 정화에 대하여 말할 때,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초탈"한다는 의미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의 초탈한다는 의미는 존재론적 차원의 부정이 아니라 정감적 차원의 부정, 예컨대 사물을 향하는 애착의 부정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선하며,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매개하는 성사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러한 피조물들을 하느님보다 사랑하고 여기에 애착을 느낄 때, 그러한 무질서한 애착이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초탈은 개인적 이기심을 포기하는 자기 극복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창조 세계의 사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두 성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부정할 대상이 무엇인지 빛을 주고 있다. 정화되어야 할 대상은 "무질서한 애착들"이다. 정화란 실재 사물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의지와 양립할 수 없는 애착을 부정하는 것이다.

2.3. 정화의 목적: 하느님께 개방하기 위한 영혼의 비움이다.
비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향해 개방하는 데 있다. 영혼의 비움인 정화는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여백을 준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신적인 것을 향유하기 위한 비움이라기 보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온전히 활동하도록 하는 비움이다.

2.4. 정화는 조명의 단계에서 더욱 심화된다.
영적 생활에서 적잖게 많은 사람들은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영지적인 깨달음, 은혜로운 감정, 고양된 감정이나 평온과 긴장 완화의 느낌, 여러 신비 현상 등의 영적 은혜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 자체와 하느님의 선물을 구분하는 영적 식별의 지혜가 필요하다. 두 성인은 조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참된 의미를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조명은 최상의 영지적 인식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당함과 하느님의 선함과 자비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조명은 위안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으신 것과 같은 영혼의 메마름이나 고뇌의 체험으로도 나타난다.

2.5. 정화는 향주삼덕의 실천에서 실현된다.
최근 많은 사람들은 동양 종교나 정신분석학의 심리적 기법이나 신체의 자세와 태도를 중시하면서 그것들의 과장됨과 일방성의 위험들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 물론 일종의 수덕적인 기법으로서 몸의 태도나 자세를 통해 효과적으로 영혼이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기도를 돕는 유익한 기법으로써 마땅히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유용한 수덕적이고 심리적 기법들은 향주삼덕을 실천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법들은 직접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로 영혼을 이끌지 못한다. 두 성인은 향주삼덕을 우리에게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향주삼덕의 실천만이 영혼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수단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도록 제시된 길이다. 향주삼덕의 실천으로 영혼의 기능들이 순전히 자연적인 작용에서 정화되어 초자연적으로 작용하게 되고, 영혼의 기능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양자적인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다.

2.6. 정화는 지속적인 심화 과정이다.
요사이 우리 교회 내에서 심리적 기법이나 방법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죄나 악에 대한 생각마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죄의식이 집중을 방해하며, 정화의 핵심은 무의식적 동기와 싸우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에 비중을 두는 이론은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칩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더 나아가 무의식은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 한 죄가 아니며, 의지적으로 범한 죄가 아니라면 도덕적인 책임이 없다. 물론 하느님의 의지와 양립할 수 없는 영혼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습관이나 죄의 경향성들로부터 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의 깊은 정화는 점차 정화의 과정이 심화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두 성인은 정화의 점차적인 내면화로 깊어지는 과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정화는 능동적인 정화가 앞선다. 죄와 죄의 세력들, 그리고 의식 안으로 떠오른 무의식적인 동기들, 즉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죄의 세력들과 투쟁을 통해 영혼이 이들 세력들로부터 정화된다. 이러한 능동적인 정화 후에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수동적인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영혼은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비의지적인 경향성들로부터 까지 정화된다.

3. 결어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 요한은 영혼의 정화를 중심으로 하여 영성 생활에 대한 이론과 실천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도 영성 생활의 여정 안에서 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영혼의 정화의 측면은 오늘날 영성 생활의 다른 측면, 예컨대 조명이나 일치의 측면에 비해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본 논문은 두 성인의 정화에 대한 가르침의 몇 가지 주제들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까지 대단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두 영적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보편적인 측면과 특수한 측면들을 명료하게 하였다. 또한 두 성인의 가르침이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왜 그런지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리스도교 교의와 전통에 부합하는 두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겨 봄으로써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식별 기준을 제공하면서 영성 생활에 토대로서 정화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 논문 요약글에서 발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신학토착화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함께 했던 한 해 선배 신부님께서 이탈리아에서 영성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날씬한 외모나 느긋한 말투 역시 세월이 꽤 흘렀지만 변한 것이 없었다. 한국 교회가 비약적인 성장을 했지만 양적인 팽창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한국교회의 영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공감한다. 많은 한국 교회 수도자나 성직자라면 피정을 통해 한 번씩 이냐시오 영성 수련을 받아 보았을 것이다. 이성적인 추리를 통한 묵상, 관상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다가간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영신 수련 방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으로 볼때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방법보다는 감성적이고 종합적인 직관에 더 공감한다고 느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했던 선배이지만 이 논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더 가톨릭적인 전통을 고수하며 굳어진 느낌이 주어져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적 정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 한국인의 심성에 더욱 맞는 한국인의 가톨릭 영성이 지금도 이러한 작은 노력들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믿는다.

길벗 고수 외침.